그 후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 진영은 간신히 승리했다.
하지만 중동은 이때부터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특히 팔레스타인 지방은 더없이 혼란 속에 놓였다. 아랍 세계와 유대인 사회의 대립이 싹이 튼 것이다.
영국의 삼중 외교가 불러온 미리 예견된 결과였다.
팔레스타인 지방은 국제연맹의 결정에 따라 영국의 위임통치령으로 지정된다.
제1차 세계대전 종결될 당시, 팔레스타인에는 약 75만 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으며,
그중 65만 명이 아랍인이었다. 물론 유대인도 거주하였으나 소수에 불과했다.
그들은 서로 친밀한 정도까지는 아니었어도 대체로 평온히 공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밸푸어선언을 계기로 수많은 유대인들이 이주하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유대인 수는 5만명이 채 되지않았으나,
1931년부터 1935년 사이에 15만명이나 되는 주민들이 대거 이주했다.
이를 두고 아랍인 사회는 크게 반발했다.
영국은 이스라엘 시장자리에 아랍인을 앉히는 등 아랍 쪽을 배려했지만,
유대인들의 이민이 날이 갈수록 증가함에 따라 유대 사회가 가하는 압력도 거세졌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유대인과 아랍인들 간의 충돌이 빈번히 발생했고, 때로 유혈사태가 일어나기도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진 유대인과 아랍인의 대립은 한계점에 다다랐다.
이에 영국은 결국 위임통치를 포기하고 팔레스타인을 국제연합에 맡기기로 했다.
국제연합에선느 팔레스타인을 셋으로 유대인 자치구, 아랍인 자치구, 그리고 일부는 국제연합으로 분할하였다.
유대인 쪽은 내키지 않아도 제안을 받아들였으나, 아랍 쪽은 그러지 못했다.
1948년 5월 14일, 영국의 위임통치가 종료되자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건국을 선언했다.
이와 동시에 독립을 승인하지 않은 주변 아랍 국가들과의 전쟁이 발발했다. 이것이 제1차 중동전쟁이다.
아랍진영에는, 이집트, 시리아, 모로코, 레바논, 이라크,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 예멘 등이 참전했으며,
다수의 영국군 장교들도 아랍군쪽에 동참했다.
15만 명의 아랍군에 비해 이스라엘 군은 3만 명 수준이라 아랍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듯 보였으나,
이스라엘군에는 종군 경험이 있는 이들도 많았던 데다, 아랍군의 결속이 너무나 약했다.
결국 아랍군은 이스라엘의 공격에 쩔쩔매다 도리어 이스라엘군의 반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제1차 중동전쟁은 1949년에 휴전협정을 체결하여 종결되었으나 얄궂게도 아랍 쪽이 잃은 것이 더 많았다.
이스라엘은 국제연합이 정한 유대인 자치구 이상의 지역을 지배한 반면 아랍은 그러지못하고 잃기만 했을 뿐이었다.
이 휴전협정에서 정해진 경계선이 현재 국제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스라엘 국경선이다.
전쟁 중에는 주변국으로 도망친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이스라엘 정부로부터 귀환을 허가받지 못했고
수십 만 명이나 되는 난민이 생겨나 지금까지도 몇 대에 걸쳐 난민 캠프에서 생활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것이 팔레스타인 난민이 겪고 있는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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